지난 인생에서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모두에게 친절하지 못했다는 것, 이것 하나인 것 같다. 

옳은 것과 맞는 것, 바람직한 것만을 찾아다니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만을 찾아다녔다.  

모두에게 친절해야 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When given the choice betwe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

Be kind, for everyone is fighting a hard battle.

And if you really wanna see what people are,

all you have to do.....is look.

from WONDER

옳은 것과 친절한 것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을 선택하라.

모두가 인생이라는 힘든 전투를 하고 있다.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냥 바라 보고 있으면 된다. 

인간은 이성과 호기심의 힘을 제어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 있기 위해서 유일하게 의지하며 기댈 곳이기 때문이다.

 

이 힘은 인간들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기를 계속 갈망하게 만든다. 

그것이 그 힘들의 속성이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계속 신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더라도, 가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운명이다.

절대 멈출 수 없다. 

멈추고 싶다해도 멈출 수 없다.

 

이성과 호기심은 결정체인 과학은 계속 발견하고 있다. 

블랙홀, 양자 상태

블랙홀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양자 상태에서는 동일한 순간에 동전의 양면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듯한 현상이다.  

 

이제는 과학인지 철학인지 종교인지, 신화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또한 인간의 호기심은 자연과 인간에게서 수집한 지식을 사용해 보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인공 지능, 생명 과학

이제 인간은 신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들어가다 불타 죽는 이카로스의 운명일지라도.

지구가 버텨주는 한 계속 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신이 있다면, 그도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모습을 드러내든지

아니면, 물로 씻어 버리고 새로운 상황으로 리셋하든지.

 

아이가 자라나면 자라날 수록 자신을 닮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가르켜 주지 않았는데도, 한번도 보여 주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싫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보게 되는 때가 있다. 

깜짝 놀라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약속 시간, 정해진 시간에만 늦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미적거린다.

그러다 결국 정해진 시간에 늦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바라는 것에 대한 목표는 없고

그저 지금 당장 어려운것, 힘든 것만 요리 조리 피해 다닌다.

그렇게 인생의 시간을 요리 조리 낭비해 버린다.

 

그런 자식을 보면서 화가 난다.  

그리고 그렇게 화를 내는 자신에게 또 화가 난다.

 

자식에게 화가 나는 것은 

거울을 보면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거울 보면서 화 내고 있는 듯한 이 상황.  

화가 나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상황에 짜증이 나기도 하고,

내가 자신을 좀 더 사랑했으면 하는 우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산다는 것이 무슨 코미디 같기도 하고.

 

봉준호 감독이, 한국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 수상했단다.

그런데 기사를 보다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감성 포텐이 터진다.

"주52시간 지킨 '기생충', 황금종려상보다 놀랍다"

기존의 열악한 영화 제작 환경, 관행에서 벗어나 모든 스태프들과 표준 계약서로 계약하고 나서 영화를 찍었단다.

 

세상에는 해야 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되지 않겠냐는 정도의 말로 끝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 전략을 세워서 실천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자신이 아는 것을 어떻게 세상에 구현할지를 배우기 위해서

8년간의 헐리우드 쪽과 협업을 하는 전략을 세우고 

미국식 영화 제작 방식을 몸으로 익히고...

 

어떤 것을 목표로 해서 수년간을 인내와 의지로 실천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을 한다.  

갑자기 뭉클해지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론적으로만 따지는 경향이 있고

행동하는 실천력이 부족한 나에게는 감동의 포인트이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 세상을 바라보고 소통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는 듯하다.  

 

들리는 그대로의 소리와 표현에 의존하는 소통이 있다. 

언어 소리와 표현이 가지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로 통신하는 방법이다.

 

한 차원은 더 높은 소통으로는

논리에 의존하는 소통이 있다.

이성을 바탕으로 생각과 말을 조리있게 주고 받는 통신이다. 

 

더 한차원 높은 소통으로는 

사랑과 배려에 의한 소통이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리고 배려하는 방식의 통신이다. 

 

인간은 태어나면 이런 소통 방법을 순차적으로 깨달아 간다. 

 

세상에 막 태어나서는 소리에 집중한다.

소리를 배우고 소리의 뜻과 의미를 배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말의 의미를 주고 받는 식으로 소통한다. 

 

성장하면서는 논리를 배운다. 

논리력으로조리 있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집중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따질 수 있는 능력을 성장시켜 나간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서는

인생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사랑과 배려로 소통하는 방법을 깨달게 된다. 

 

나이가 들면 이런 순으로 통신이 변해야 한다. 

소리와 표현->논리와 이성->사랑과 배려

나이가 들어서도 이렇게 변하지 않으면 볼성사납게 된다.  

 

근데 이것이 쉽지 않다. 

 

40, 50, 60이 되어서도

논리로 싸우고, 심지어는 "아"와 "어"로 싸운다면,

영 보기는 좋지 않을 듯 싶다. 

그리고 그가 속한 가정에서 가족간의 소통이 잘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소통에서 매우 힘들어할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소통 방식은 나이에 따라 변해가야 하고, 

그것이 그의 행복과도 관련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제의 시간과 오늘의 시간 그리고 내일의 시간이

변하지 않고 동일하게 흐르는데

우리의 생각과 습관만 갑자기 변하도록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바쁘고 지친 일상이라도

조금이라도 생각하면서

정신적인 여유를 가지도록 노력하면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서

살려고 하는 삶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세상은 유토피아도 아니고 그래서 세상의 현실은 항상 상반되는 두 개념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좋은 것, 나쁜 것", 

"해야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등등등


그러나 이렇게 뭔가를 둘로 나누는 작업은 사람을 매우 힘들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작업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두 개념들은 우리의 세상을 받치는 양측의 기둥들일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분명 이런 나누어진 개념들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런 현실이 세상과 사람의 운명일것이다. 그런 운명의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자라면서, 살아가면서 이렇게 나눠진 개념을 배우고 그리고 직접 나눠야하는 시기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시기"라는 것이 있는 듯하다. 이제 내 나이가 나누는 시기를 거쳐서 넘어서고 있는 듯 하다. 그러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좋고 나쁜 것도 없다.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없다. 인생의 모든 것들이 다 있는 그대로 의미가 있다고 느끼는 나이가 되고 있는 듯하다. 


"정도의 차이", 많이도 들어 왔지만, 이렇게 내가 직접 느끼는 시기가 올 줄은 몰랐다.이제 그 타이밍이 된 것 같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것이 기쁘지만은 않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 같다. 





인생의 끝에는 해답이 없다는 것은 알겠다. 무엇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럼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 나는 이 인생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이해할려고 해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함을 갖추면 그것으로 될까?  사랑과 행복의 의미를 깨달으면 그것으로 족할까? 설령 허무함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뒤에 올 인생 후배들이 좀 더 행복해졌으면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일까?


아~,하늘의 명을 들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듣지 못하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것을 듣지 못할 것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나의 비관적인 기질 때문일까? 2018년도 첫눈  때문일까? 아니면  바이오 리듬이 좋아지면 다른 의미가 생겨날까? 왠지 쓸쓸해지는 날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분명한 것은 하나 있는 것 같다. 내가 왜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동안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행복했으면 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 "솔루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이해해라. 



정리할 바구니를 건네줘라. 

- 질문을 하라. "가장 힘든 게 뭐야? 그것을 해결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답을 주려고 하지 말자. 그가 선택하는 것이 답이다.




모든 분야에서 동일한 이슈가 있는 듯 하다.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이고 배경이 되는 것에 주목할 것인가? 무엇인가를 익혀야 하는 경우도 눈에 보이는 기법을 먼저 선택하느냐 아니면 배경이 되는 원리와 철학을 먼저 생각하느냐?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할때도,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중하느냐 아니면 보이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이 없는지를 먼저 관찰하느냐? 그리고 보이는 현상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느냐 아니면 시스템이나 구조적인 차원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느냐?


항상 어느 것이 바람직하다는 답은 없다. 사안에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것에 끌리는 사람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에 먼저 끌리는 사람이 있는 있는 듯하다. 그 사람의 성향에 다른 것 같다. 그러나 항상 보이지 않는 근본적인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효과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너무 심각하게 가다 보면 사안에 따라서는 벼룩 잡으려다 초간 삼간 태울 수 도 있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 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눈에 보이는 테크닉은 문화의 차이와도 비슷한 개념이다.  물론 에티켓이라는 것도 있긴 하지만, 말투나 말하는 테크닉이 다르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란 문화가 다르다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진정성일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에 대하서 그 사람의 마음과 진성성을 일일이 파악하기는 힘든 상황도 있을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에티켓과 예절만으로 사람을 판단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있을 수 도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하지 한다.


원하지 않는 것을 해야 할 때

원하는 것을 못할 때


그리고


원하는 것이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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