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리 삶의 가치 체계를 생각해보다가 그 체계의 위치가 우리 삶에서 어디쯤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컴퓨터 프로그램의 체계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컴퓨터 세계의 계층 구조와 비유해서 그림을 그려봤다. 



이렇게 해 놓고 보면 명확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인간의 분쟁과 싸움이 생기는 곳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 체계" 계층이라는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다.  근데 사실 가장 걱정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제일 아래에 있는 인프라 계층 즉 지구, 자연환경 계층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 상위 계층의 존재 의미도 없다는 것은 명확한데, 이것을 평소 자주 잊고 지낸다. 지금은 인프라 계층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렇게 그림을 그려놓고 보니, 어느 환경 운동가의 말이 절실하게 와 닿는다. 


민주주의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할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 살아 남을 것을 것이다.

경제 체계에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 환경에 문제가 생기면, 나라는 그것을 해결할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자연 환경은 건강한 발전과 성장의 기반이다. 그것은 나라의 역사와 자유의 기반이다.

Maritza Morales Casanova, Mexico


물리적인 인프라 환경이 위험해지면 상위의 논리 계층들은 그 존재의 의미가 없어 지게 된다는 명확한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흔히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놓친다"고 한다.

우리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우리는 한번에 둘을 가질 수는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선택을 하게 될때, 

우리가 선택한 것이  

항상 훌륭하거나 대단한 것, 옳은 것이어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난마처럼 얽혀져 있는 이 세상의 가치 체계"에서 

우리가 선택한 것이 그 체계에 항상 맞을 수 만은 없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항상 옳을 수 많은 없다.

우리의 가치 체계는 우리 인간이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명확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고

우리가 느끼고 있고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선택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서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어서 자신만의 이야기로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 삶에 옳고 그름은 없다. 

자신이 한 선택들로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면 그것으로 족하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기준은 

그것이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어내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회의를 갖거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지 못할 필요는 없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고 
그것에 맞게 선택하고 집중하면 되지 않을까? 


인터넷에 흘러다니는 한마디의 말이 잠시 생각을 하게 만든다.

Whether you think you can or you think you can't, 

you're right.





돈을 내고 워렌 버핏 같은 사람하고 한 끼 식사를 하는 이벤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금액이 만만찮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식사 한끼 기회 얻기가 힘들다고 한다. 


왜 일까? 

인생을 살아가는 그만의 비법을 얻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돈을 버는 그만의 비법이 있어서일까? 

물론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좋은 정보도 얻었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것은 아닐 거라고 본다. 


그가 하는 말은 새로운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그가 하는 말은 

그가 하면 달라질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영감"이라고 한다.

워렌 버핏같은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즉 그에게서는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이처럼 

정보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주고 받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돈을 주고도 얻기 힘든 것이다.

깨달음이란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얻고 나면 쉬워보이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경우는 

마치 서로 다른 쪽을 평생 보지 못하는 동전의 양면같기도 하다. 


그러나 설령 깨닫게 만드는 방법은 아직 명확하지 않더라도 

배우고 가르치는 목표는 명확하고 동일해야 한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의 목표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깨달음과 영감이어야 한다. 

"아하~!", 이것이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의 목표여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것이 AI와 차별화된 인간의 교육이다.  



AI가 만든 음악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주크데크

AI가 만든 곡으로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단다.


이 사이트의 인공 지능은 사용자가 몇 개의 선택만 하면 곡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 만들어진 곡은 저작권까지 개인에게 판매될 수도 있다.


나도 한번 사이트에 가입해서 클릭 몇 번으로 음악을 한번 만들어본다.

Elector Folk 


주크데크로 곡을 구매하려면

√원하는 음악 장르 선택(피아노, 록, 팝, 영화음악 등)

√음악의 분위기(무드) 선택

√원하는 길이를 입력(최대 5분)

√곡의 중심 악기를 선택

√클라이맥스가 어디쯤에서 연주될지 선택

√곡의 빠르기를 입력

√음악을 듣고 나서 곡을 구매할지 결정(구매하지 않더라도 다운로드 가능)

※ 저작권까지 보유하려면 199달러


AI는 조금씩 우리의 생활에 스며들고,

우리는 AI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그렇게 또 다른 커다란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뀐듯 하지만, 

아이는 부모를 닮아간다, 거의 그대로.


부모가 작은 것에 신경쓰면, 아이도 작은 것에 신경쓰는 사람으로 자란다.

부모가 큰 것에 신경쓰면, 아이도 큰 것에 신경쓰는 사람으로 자란다.

부모가 독서를 좋아하면, 아이도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란다.

부모가 TV를 좋아하면, 아이도 TV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란다.

부모가 걱정을 많이 하면, 아이도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자란다.

부모가 부끄러움이 많으면, 아이도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으로 자란다.

부모가 기쁨이 많으면, 아이도 기쁨이 많은 사람으로 자란다. 

부모가 예민하면, 아이도 예민한 사람으로 자란다.


아무리 자신의 단점과 장점을 아이에게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다.

아이에게서 보이는 모습, 그것은 부모 자신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자신의 부모 즉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일 수 있다. 


만약, 

부모 자신은 "그런 모습"이면서, 아이에는 "다른 모습"을 요구하면,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거나, 삐뚤어져 자란다.


더욱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부모의 모습이 아이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의식적인 과정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신도 모르게 

무심결에 툭툭 드러내는 감정들, 습관들을 통해서 

아이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즐거운 것인지 등을 

무의식적으로 배우게 된다.  

부모가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고, 행복해하는 것 등을 통해서 
부모의 모습이 자식에게로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부모도 모르게 그리고 자식도 모르게. 


아이가 부모로부터 좋은 모습을 상속받도록 하기 위해서 

또는 상속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은 

자칫하면 헛된 일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무의식과 잠재의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의 가치들의 양면성을 깨닫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인생의 모든 장점들과 단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점들이고,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었는지 인간의 논리와 사고로는 모두 파악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가 영향을 받으면 다른 것들이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영향은 장점들과 단점들간에서 어떤 식으로 퍼져나갈지 알 수 없다." 

인생을 살다 간 많은 사람들은 이런 취지의 말들을 한다.
철학가, 물리학자, 시인, 소설가, IT 기술가 등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종교를 가졌든, 종교를 가지지 않았든
그들이 했던 일들과는 상관없이 인생의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말을 한다. 
심지어는 물리학의 이론도 그것을 암시해준다(양자 역학의 관측의 문제).

그렇다면, 난마(亂麻)처럼 얽힌 장점과 단점들의 가치들 사이에서 
하나를 어설프게 강조하면 
그것이 다른 가치에 어떤 나비 효과를 일으킬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쉬운 방법"으로 아이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그만큼 좋지 않은 효과도 함께 전달된다.

삶의 가치들의 양면성은 

아이의 모습을 제어하기 위해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인위적으로 그 모습을 가공하려는 노력은

부모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가장 아름다운 인형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조각 조각 헝겊을 덧대는 것일 수 있다. 

일관되지 않고, 상충되는 가치 조각들로 인해서 

아이는 성장해 가면서 괴로워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다면, 
부모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의 모습이 무의식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사고와 의식을 넘어서 무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다. 
수양을 하든, 경험을 많이 하든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간에 
아이를 바꾸고 싶다면, 부모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한편으로, 아이들을 향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사랑을 주는 일 밖에 없을 것 같다. 
사랑이야 말로 교육을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자연 환경"이라고 본다. 
이 "자연 환경"속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가치들을 선택하면서 자라도록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교육 환경 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랑이라는 "자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인간 세상의 불완전한 가치들의 정글을 헤쳐나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자라게 되지 않을까 싶다. 

두 번 살아 보지 않아서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지나간 삶을 돌이켜보면,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이 생을 떠날때까지 
노력하면서도 즐기고, 즐기면서도 노력하고 
그리고 아이가 자신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사랑과 믿음으로 지켜봐주고, 
그리고 옆에서 아이들이 물으면 대답해주는 것, 그것이 최선일 듯 하다.  

"아이가(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
- 로버트 플검 지음

이제는 아이가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우린 그저 아이들한테 추억이 되면 돼.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유령같은 존재가 되는 거지."
- 인터스텔라

자신의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알고 싶다면, 

부모 자신들이 북마크해 둔 웹 사이트들과

자신들이 방문한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보는 것에 의해서 정의된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인터넷 즐겨찾기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최인철 교수)

부모가 보는 것, 듣는 것 그리고 느끼는 것들이 바로

아이가 보는 것, 듣는 것 그리고 느끼는 것들이 된다.  


아이에게 영향을 주고 싶다면, 
아이를 교육시키고 싶다면,
아이가 인공 지능의 정글 속에서 살아남도록 하고 싶다면,
부모 자신들의 인생에 대한 "즐겨찾기 목록"과 "관심 목록"을 바꿔야 할 수 밖에 없다.


※ 근대 교육 환경에서 미래의 교육 환경으로 가기 위한 길을 고민하다가...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어느 날(2018.03.06)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쥐~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
제일 좋아하는 심리학 교수중의 한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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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을 보고 싶은 본능"이 가족의 영역을 벗어나서 전 인류로 확장되는 예이다. 


이 소녀의 바램은 해결될까? 


이기심과 욕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생존을 본능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탐욕의 수준이라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영원한 개념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존재"인 "인간, 인류"는 지금의 상황을 인식하고 가던 길을 바꿀 수 있을까? 개인의 문제라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수정하기도 혼자만의 결심으로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 인간 집단의 의식은 알면서도 수정하는 것이 쉽지 만은 아닐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가던 방향을 틀어서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인간 집단에게는 가능한 일일까? 


국가간의 정치적 문제, 경제적 문제 등 "어른들의 문제"가 이 소녀의 바램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텐데, 그런 이해 관계를 넘어서서 생존의 문제에 대해서 의식 통합될 수 있을까?  


인간이 만든 인공 지능에 의해서 인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탐욕이 도를 지나치고 있는 이 상황을 먼저 인식할 수 있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돌아와야 할 것 같다. 현재 상황에서 인공 지능 로봇이 나온다면, 그 인공 지능 로봇은 그것을 만든 주체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충족시키기위해서 사용될 가능성이 많다. 지금처럼 수익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 있는 기업 정신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인공 지능 로봇을 만드는 주체는 전체 인류를 위한 목적으로 개발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인공 지능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인간의 마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92년의 연설. 그녀 개인의 인생도 이제 중년이 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평생 지구와 인간을 위해서 살아왔을 것 같다. 그러나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는 세상이다. 그녀는 어떤 기분이 들까? 그녀는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고 있을까? 그녀의 인생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어진다. 


인생... 무엇을 해야 의미있고 행복했다는 기분이 들까? 무엇을 해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나의 삶이 될까? 



2018/01/29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1

2018/01/30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2

2018/01/31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3

2018/02/04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4

2018/02/05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5




▣인생 가치들의 근본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실존적인 존재들이다. 이런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인류들에게 눈을 돌리라고 주장하는 가치 개념들에 대해서 가치를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어서, 이데올로기나 이념처럼 "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서 다른 사람들과 인류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논리가 가능할까? 어떻게 해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자신이 떠난 후의 사람들을 고려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내가 죽고 나면 아무 의미도 없어지게 된다면 그런 가치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까?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가치들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원한 그 무엇"은 윤리나 도덕,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원시 시대에도 통용되고 앞으로도 통용될 수 있는 인간의 본능, 본성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살아 남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인정한다. 이처럼 실존적인 관점에서 근거가 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 무엇을 찾을 수 있는 힌트를 주는 것을 찾다 보면,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행복을 느낄 때 갖는 그 느낌을 "좋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설령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에는 그 행복감을 가장 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명확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난 이것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 본성"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들(철학자)들이 말하는 "절대적 아름다움", "선", "정의"등도 다른 사람이 없다면 그런 가치들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런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존재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본능은 계층적이다.


인간의 본능은 계층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듯하다. 제일 먼저 나타난 본능은, 분명 야생의 시대에서 자신이 살아 남고자 하는 본능일 것이다. 이것은 동물적인 본능에 가까운 것으로서, 이 본능은 근본적인 하위 계층에 존재하면서 인간들을 살아 남고자 하는 욕구에 충실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분명하다. 설령 원시 시대라 할지라도 태어나면서 부터 최소한 부모라는 존재와 함께 인간 그룹을 만들게 된다. 태어나면서 부터 인간은 자신의 안전을 위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이 아닌 사랑하는 주변의 사람들도 함께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가지고 태어난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본능은 생명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동물적인 본능이다. 다른 사람이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부터는 다른 동물들과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동물의 경우에도 다른 객체를 위해서 죽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사람의 경우에도 자신의 종족을 먹어치우는 동물적인 상태에 있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주변의 다른 객체들을 지키고 싶은 본능이 더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본능으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이 아닌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죽기 까지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에서도 보여지는 특성이기도 하다).  


이렇게 봤을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자연이 준 선천적인 본능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안전과 다른 사람의 안전을 생각하는 선천적 본능때문에 우리는 일, 돈, 권력 같은 것들에 집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 남고자 하는 본능과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을 보는 마음은 근복적이고 선천적인 인간의 본능이다. 


이런 선천적 본능 위에서 다시 다른 동물들에서는 볼 수 없는 후천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들을 만들어 내는 본능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후천적 본능"이라고 불려질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확대되어서 나와도 상관없는 사람들까지도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욕구는 자유와 정의, 평등 같은 가장 높의 계층의 가치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역사가 보여주는 것에 의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만들어낸 후천적 가치를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계층적이다.  선천적 본능과 후천적 본능. 후천적 본능은 추상적인 가치를 만들어냈다. 


후천적인 본능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치는 우리는 교육과 윤리, 도덕의 수단으로 상속되어 내려온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범위의 본능은 아니다(내가 말할 수 있는 역량의 범위를 벗어난다). 여기서는 좀 더 근복적인 선천적인 본능과 가치 개념에 집중하고 싶다. 


언어가 없던 원시 시절에도 우리는 죽지 않고 살고자 하는 본능은 자신의 존재와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선천적 본성때문에 우리는 주위의 무서운 자연과 싸워왔고, 그 싸움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 이것은 나의 행복과도 일치했고 그리고 적자 생존의 자연속에서도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라고 본다. 


"나의 안전에 대한 욕구"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모든 종교들이 말하는 황금률, 즉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은 남에게 하지 마라"같은 교리들보다 인간 사회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훨씬 더 강력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종교의 황금률은 만들어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사용되기 위해서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도구이다. 그러나 선천적 본능에 의한 욕구들은 사회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사회를 유지, 개선하는 과정에 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모성애든, 부성애든, 남녀간의 사랑이든 어떤 이름의 사랑으로 불리든 간에 상관없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에도 도움이 되고, 인류의 생존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선천적 본능이 없어다면 인류는 사라졌을 것다. 나의 안전과 사랑하는 사람의 안전과 행복은 원시시대부터 존재해서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선천적인 본능 중에서 "내가 죽고 사라져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결과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개념적이면서도 동시에 실존적인 존재"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그것이 "인간 또는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려져왔다. 이것이 인간이 계속 적자 생존의 자연속에서 계속 생존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선천적인 본능 중에서 "내가 죽고 사라져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결과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개념적이면서도 동시에 실존적인 존재"를 만들어 냈다.



▣죽음과 삶의 의미


스티븐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라고. 그는 만약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지금 가치있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그대로 가치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난 조금은 다른 생각이다. 기존에 존재하는 개념들의 가치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죽음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들이 소중하다"는 식의 논리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논리상으로 문제라는 것이다. 그 말 자체가 갖는 의미에 동의하냐 동의하지 않느냐와는 다른 문제이다). 


죽음 자체에는 가치를 부여할 근거가 없다고 본다. 그것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자연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 인생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생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없다면 산 정상에서의 자연의 장엄함도, 인생의 아름다움도, 우리의 행복도 의미없다.  


그럼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게 되면  우리의 인생도 의미가 없어지게 되나?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고 나서 그가 행복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다. 사람만이 난 불행하게 만들 수 있고 그리고 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사랑의 범위가 내 가족을 벗어나서 이웃과 우리 나라, 그리고 인류로까지 벗어나도록 하는 이유는 궁극에 가서는 그 방법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가족을 죽이고 황산벌로 나갔던 계백 장군의 행동은 충효같은 이념 등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그 분의 사랑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랑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강력히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도 그것이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 달리 사랑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테레사 수녀 등 위대한 성인들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의 범위가 점점 넓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 가족을 벗어나서 이웃으로 넓어지고 결국에는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도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많은 않다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의미있게 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범위가 구체적인 범위를 벗어나서 점점 추상적인 영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당신은 청소부 일을 하면서 왜 그렇게 행복해 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구의 귀퉁이를 쓸고 있다"는 답변을 했다는 환경 미화원의 말은 인생과 자신의 일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준다.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인생을 좀 더 추상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가면 좋은 것은, 떨어져서 일상을 보게 함으로써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 교수)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된다면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인생을 조금씩 살아보니까, 나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내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던 시절을 지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았던 시절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도 행복해지고 그들도 기회를 받고 그들도 정의의 영향을 받고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어쩌면 이것도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인간에게 생기는 본능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아도 좋았다. 신을 믿지 않아도 순수하게 나의 행복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만으로도 다른 종교와 문화, 가치들과 어울리고 융합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인공 지능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육체적으로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지적인 힘도 강력한 존재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런 종이 등장해서도 우리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이 여전히 유효할까? 우리가 만들어낸 가치들의 근본적인 원동력이 된 "다른 사람이 행복하는 것을 보고 싶은 본능"과 인공 지능이 존재하는 세상과의 가치들이 융합될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이런 존재가 등장할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인간의 본질과 정체성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실존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가치와 인생의 가치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18/01/29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1

2018/01/30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2

2018/01/31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3

2018/02/04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4

2018/02/05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5



인공 지능이 나타나기 전에도, 일, 돈, 권력, 사랑 그리고 인간과 , 인생, 삶의 관계가 정확히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우리의 인생이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일, 돈 그리고 권력과 사랑에 몰두하면서 살아왔다. 그것들이 가치있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본능"이라고 믿었었다. 권력욕, 일하고자 하는 욕망, 사랑에 대한 바램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지금까지는 이런 가치들에 대한 당위성을 이론 차원에서 추상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본능"이라고 말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에는 힘들어져 버렸다. 이런것들이 왜 가치있는지에 대한 기존의 설명과 대답은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논리적이지 못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그것은 이론으로 끝나도 괜찮은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이론이나 가정 차원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인간의 생존과 실존과 관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답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인공 지능"이라는 다른 종에 의해서 인간이 대체 가능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 같고, 실제로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공 지능이 나온 후에도 계속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인류가 발견한 가치 중에서 "사랑"만큼 유용한 가치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가치들을 평가하는 일을 이제는 미룰 수 없을 것이다. 

일, 돈, 권력을 대체할 것이 무엇일까? 

현재의 이런 가치들을 대체하고도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떤 새로운 가치가 등장해야 인간의 삶이 가치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될까? 

이런 가치들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고도 인간은 계속 생존해 나갈 수 있을까?


이런 가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런 가치들을 찾는 "인간 자체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실존적인 답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또 "인생의 가치"를 물어야 할 수 있다. 이런 가치들과 행복 그리고 인간의 본능과 인간의 가치, 인생의 문제는 이제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과 관련된 질문이다. 


인류의 성현들은 인간과 인생의 생존과 그 가치에 대해서 철학해 왔다. 그들의 노력의 결과로 우리는 추구할 수 있는 가치를 구했고 그 가치를 믿으면서 행복하다고 믿고 살아왔다. 이제는 새로운 생존 철학 세계가 구축되어야 하는 때이다. 


영상에서 말하고 있듯이, 지금 당장은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라는 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과도기이다. 새로운 요구사항에 따라서 어디에선가 산책길을 거닐면서 치열하게 사색하고 있는 선각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사회와 정치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항상 주시할 수 밖에 없다. 인류의 생존과 그리고 각자의 의미와 행복을 위해서 철학과 정치 참여 등에 대한 관심은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나 때"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픈 이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아픈 마음도 내가 가고 나면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그냥 모른 체 하고 있어야 하나? 


인간이 있든 없든 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을 수 있을까? 신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인간이 아니어도 사고할 수 있는 다른 종()이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까? 


신은 그 자체만으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하자. 그러나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산출물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 종교는 인간이 존재해야 의미 있을 것이다. 인간이 다른 종()으로 대체되어도 상관없는가? 완전히 인간을 닮은 존재를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가? 사랑을 할 수 있는 감정을 갖는 존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만 계속 우기고 있을 것인가? 그 "개인의 생" 동안에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다. 인간에게 호기심과 궁금함이 있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본능이 있는 한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다. 


종교적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만 "안 된다"고 막고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교리와 윤리 도덕으로 막는다고 해서 일어날 일이 안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가치 관점에서 봤을때 이제 인간이 무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종의 출현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 


굳이 머피의 법칙이라는 이론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종교도 알고 있고 우리 개인들도 알고 있다.  그것이 인간과 세상사라는 것은 경험으로도 알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는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 교리와 윤리, 도덕에만 의존한 채 "안 된다"고만 고집하는 것은, "말은 해 보겠으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내 책임은 아니다"라는 태도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아니면 "내 생 동안에만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를까? 


새로운 종 또는 인간의 변형이 우리의 사회 구석 구석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왔을때도 계속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만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것인가? 실제로 그때가 되면 인간과 세상을 포기하고 종교로서의 역할을 그만 둘 것인가? 어떤 식의 선택을 하든 간에 인간의 가치와 인생의 가치에 대한 질문에 답을 준비해야 한다. 이제는 윤리와 도덕의 관점이 아닌 실존과 생존의 관점에서 종교도 함께 철학하고 고민해 줬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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