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9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1

2018/01/30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2

2018/01/31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3

2018/02/04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4

2018/02/05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5




▣인생 가치들의 근본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실존적인 존재들이다. 이런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인류들에게 눈을 돌리라고 주장하는 가치 개념들에 대해서 가치를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어서, 이데올로기나 이념처럼 "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서 다른 사람들과 인류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논리가 가능할까? 어떻게 해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자신이 떠난 후의 사람들을 고려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내가 죽고 나면 아무 의미도 없어지게 된다면 그런 가치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까?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가치들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원한 그 무엇"은 윤리나 도덕,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원시 시대에도 통용되고 앞으로도 통용될 수 있는 인간의 본능, 본성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살아 남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인정한다. 이처럼 실존적인 관점에서 근거가 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 무엇을 찾을 수 있는 힌트를 주는 것을 찾다 보면,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행복을 느낄 때 갖는 그 느낌을 "좋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설령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에는 그 행복감을 가장 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명확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난 이것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 본성"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들(철학자)들이 말하는 "절대적 아름다움", "선", "정의"등도 다른 사람이 없다면 그런 가치들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런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존재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본능은 계층적이다.


인간의 본능은 계층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듯하다. 제일 먼저 나타난 본능은, 분명 야생의 시대에서 자신이 살아 남고자 하는 본능일 것이다. 이것은 동물적인 본능에 가까운 것으로서, 이 본능은 근본적인 하위 계층에 존재하면서 인간들을 살아 남고자 하는 욕구에 충실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분명하다. 설령 원시 시대라 할지라도 태어나면서 부터 최소한 부모라는 존재와 함께 인간 그룹을 만들게 된다. 태어나면서 부터 인간은 자신의 안전을 위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이 아닌 사랑하는 주변의 사람들도 함께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가지고 태어난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본능은 생명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동물적인 본능이다. 다른 사람이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부터는 다른 동물들과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동물의 경우에도 다른 객체를 위해서 죽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사람의 경우에도 자신의 종족을 먹어치우는 동물적인 상태에 있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주변의 다른 객체들을 지키고 싶은 본능이 더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본능으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이 아닌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죽기 까지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에서도 보여지는 특성이기도 하다).  


이렇게 봤을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자연이 준 선천적인 본능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안전과 다른 사람의 안전을 생각하는 선천적 본능때문에 우리는 일, 돈, 권력 같은 것들에 집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 남고자 하는 본능과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을 보는 마음은 근복적이고 선천적인 인간의 본능이다. 


이런 선천적 본능 위에서 다시 다른 동물들에서는 볼 수 없는 후천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들을 만들어 내는 본능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후천적 본능"이라고 불려질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확대되어서 나와도 상관없는 사람들까지도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욕구는 자유와 정의, 평등 같은 가장 높의 계층의 가치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역사가 보여주는 것에 의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만들어낸 후천적 가치를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계층적이다.  선천적 본능과 후천적 본능. 후천적 본능은 추상적인 가치를 만들어냈다. 


후천적인 본능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치는 우리는 교육과 윤리, 도덕의 수단으로 상속되어 내려온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범위의 본능은 아니다(내가 말할 수 있는 역량의 범위를 벗어난다). 여기서는 좀 더 근복적인 선천적인 본능과 가치 개념에 집중하고 싶다. 


언어가 없던 원시 시절에도 우리는 죽지 않고 살고자 하는 본능은 자신의 존재와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선천적 본성때문에 우리는 주위의 무서운 자연과 싸워왔고, 그 싸움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 이것은 나의 행복과도 일치했고 그리고 적자 생존의 자연속에서도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라고 본다. 


"나의 안전에 대한 욕구"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모든 종교들이 말하는 황금률, 즉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은 남에게 하지 마라"같은 교리들보다 인간 사회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훨씬 더 강력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종교의 황금률은 만들어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사용되기 위해서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도구이다. 그러나 선천적 본능에 의한 욕구들은 사회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사회를 유지, 개선하는 과정에 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모성애든, 부성애든, 남녀간의 사랑이든 어떤 이름의 사랑으로 불리든 간에 상관없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에도 도움이 되고, 인류의 생존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선천적 본능이 없어다면 인류는 사라졌을 것다. 나의 안전과 사랑하는 사람의 안전과 행복은 원시시대부터 존재해서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선천적인 본능 중에서 "내가 죽고 사라져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결과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개념적이면서도 동시에 실존적인 존재"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그것이 "인간 또는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려져왔다. 이것이 인간이 계속 적자 생존의 자연속에서 계속 생존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선천적인 본능 중에서 "내가 죽고 사라져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결과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개념적이면서도 동시에 실존적인 존재"를 만들어 냈다.



▣죽음과 삶의 의미


스티븐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라고. 그는 만약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지금 가치있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그대로 가치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난 조금은 다른 생각이다. 기존에 존재하는 개념들의 가치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죽음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들이 소중하다"는 식의 논리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논리상으로 문제라는 것이다. 그 말 자체가 갖는 의미에 동의하냐 동의하지 않느냐와는 다른 문제이다). 


죽음 자체에는 가치를 부여할 근거가 없다고 본다. 그것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자연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 인생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생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없다면 산 정상에서의 자연의 장엄함도, 인생의 아름다움도, 우리의 행복도 의미없다.  


그럼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게 되면  우리의 인생도 의미가 없어지게 되나?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고 나서 그가 행복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다. 사람만이 난 불행하게 만들 수 있고 그리고 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사랑의 범위가 내 가족을 벗어나서 이웃과 우리 나라, 그리고 인류로까지 벗어나도록 하는 이유는 궁극에 가서는 그 방법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가족을 죽이고 황산벌로 나갔던 계백 장군의 행동은 충효같은 이념 등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그 분의 사랑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랑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강력히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도 그것이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 달리 사랑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테레사 수녀 등 위대한 성인들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의 범위가 점점 넓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 가족을 벗어나서 이웃으로 넓어지고 결국에는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도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많은 않다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의미있게 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범위가 구체적인 범위를 벗어나서 점점 추상적인 영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당신은 청소부 일을 하면서 왜 그렇게 행복해 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구의 귀퉁이를 쓸고 있다"는 답변을 했다는 환경 미화원의 말은 인생과 자신의 일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준다.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인생을 좀 더 추상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가면 좋은 것은, 떨어져서 일상을 보게 함으로써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 교수)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된다면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인생을 조금씩 살아보니까, 나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내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던 시절을 지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았던 시절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도 행복해지고 그들도 기회를 받고 그들도 정의의 영향을 받고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어쩌면 이것도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인간에게 생기는 본능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아도 좋았다. 신을 믿지 않아도 순수하게 나의 행복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만으로도 다른 종교와 문화, 가치들과 어울리고 융합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인공 지능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육체적으로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지적인 힘도 강력한 존재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런 종이 등장해서도 우리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이 여전히 유효할까? 우리가 만들어낸 가치들의 근본적인 원동력이 된 "다른 사람이 행복하는 것을 보고 싶은 본능"과 인공 지능이 존재하는 세상과의 가치들이 융합될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이런 존재가 등장할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인간의 본질과 정체성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실존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가치와 인생의 가치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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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지능이 나타나기 전에도, 일, 돈, 권력, 사랑 그리고 인간과 , 인생, 삶의 관계가 정확히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우리의 인생이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일, 돈 그리고 권력과 사랑에 몰두하면서 살아왔다. 그것들이 가치있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본능"이라고 믿었었다. 권력욕, 일하고자 하는 욕망, 사랑에 대한 바램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지금까지는 이런 가치들에 대한 당위성을 이론 차원에서 추상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본능"이라고 말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에는 힘들어져 버렸다. 이런것들이 왜 가치있는지에 대한 기존의 설명과 대답은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논리적이지 못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그것은 이론으로 끝나도 괜찮은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이론이나 가정 차원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인간의 생존과 실존과 관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답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인공 지능"이라는 다른 종에 의해서 인간이 대체 가능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 같고, 실제로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공 지능이 나온 후에도 계속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인류가 발견한 가치 중에서 "사랑"만큼 유용한 가치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가치들을 평가하는 일을 이제는 미룰 수 없을 것이다. 

일, 돈, 권력을 대체할 것이 무엇일까? 

현재의 이런 가치들을 대체하고도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떤 새로운 가치가 등장해야 인간의 삶이 가치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될까? 

이런 가치들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고도 인간은 계속 생존해 나갈 수 있을까?


이런 가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런 가치들을 찾는 "인간 자체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실존적인 답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또 "인생의 가치"를 물어야 할 수 있다. 이런 가치들과 행복 그리고 인간의 본능과 인간의 가치, 인생의 문제는 이제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과 관련된 질문이다. 


인류의 성현들은 인간과 인생의 생존과 그 가치에 대해서 철학해 왔다. 그들의 노력의 결과로 우리는 추구할 수 있는 가치를 구했고 그 가치를 믿으면서 행복하다고 믿고 살아왔다. 이제는 새로운 생존 철학 세계가 구축되어야 하는 때이다. 


영상에서 말하고 있듯이, 지금 당장은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라는 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과도기이다. 새로운 요구사항에 따라서 어디에선가 산책길을 거닐면서 치열하게 사색하고 있는 선각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사회와 정치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항상 주시할 수 밖에 없다. 인류의 생존과 그리고 각자의 의미와 행복을 위해서 철학과 정치 참여 등에 대한 관심은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나 때"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픈 이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아픈 마음도 내가 가고 나면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그냥 모른 체 하고 있어야 하나? 


인간이 있든 없든 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을 수 있을까? 신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인간이 아니어도 사고할 수 있는 다른 종()이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까? 


신은 그 자체만으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하자. 그러나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산출물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 종교는 인간이 존재해야 의미 있을 것이다. 인간이 다른 종()으로 대체되어도 상관없는가? 완전히 인간을 닮은 존재를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가? 사랑을 할 수 있는 감정을 갖는 존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만 계속 우기고 있을 것인가? 그 "개인의 생" 동안에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다. 인간에게 호기심과 궁금함이 있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본능이 있는 한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다. 


종교적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만 "안 된다"고 막고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교리와 윤리 도덕으로 막는다고 해서 일어날 일이 안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가치 관점에서 봤을때 이제 인간이 무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종의 출현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 


굳이 머피의 법칙이라는 이론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종교도 알고 있고 우리 개인들도 알고 있다.  그것이 인간과 세상사라는 것은 경험으로도 알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는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 교리와 윤리, 도덕에만 의존한 채 "안 된다"고만 고집하는 것은, "말은 해 보겠으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내 책임은 아니다"라는 태도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아니면 "내 생 동안에만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를까? 


새로운 종 또는 인간의 변형이 우리의 사회 구석 구석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왔을때도 계속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만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것인가? 실제로 그때가 되면 인간과 세상을 포기하고 종교로서의 역할을 그만 둘 것인가? 어떤 식의 선택을 하든 간에 인간의 가치와 인생의 가치에 대한 질문에 답을 준비해야 한다. 이제는 윤리와 도덕의 관점이 아닌 실존과 생존의 관점에서 종교도 함께 철학하고 고민해 줬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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