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바라보고 소통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는 듯하다.  

 

들리는 그대로의 소리와 표현에 의존하는 소통이 있다. 

언어 소리와 표현이 가지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로 통신하는 방법이다.

 

한 차원은 더 높은 소통으로는

논리에 의존하는 소통이 있다.

이성을 바탕으로 생각과 말을 조리있게 주고 받는 통신이다. 

 

더 한차원 높은 소통으로는 

사랑과 배려에 의한 소통이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리고 배려하는 방식의 통신이다. 

 

인간은 태어나면 이런 소통 방법을 순차적으로 깨달아 간다. 

 

세상에 막 태어나서는 소리에 집중한다.

소리를 배우고 소리의 뜻과 의미를 배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말의 의미를 주고 받는 식으로 소통한다. 

 

성장하면서는 논리를 배운다. 

논리력으로조리 있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집중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따질 수 있는 능력을 성장시켜 나간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서는

인생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사랑과 배려로 소통하는 방법을 깨달게 된다. 

 

나이가 들면 이런 순으로 통신이 변해야 한다. 

소리와 표현->논리와 이성->사랑과 배려

나이가 들어서도 이렇게 변하지 않으면 볼성사납게 된다.  

 

근데 이것이 쉽지 않다. 

 

40, 50, 60이 되어서도

논리로 싸우고, 심지어는 "아"와 "어"로 싸운다면,

영 보기는 좋지 않을 듯 싶다. 

그리고 그가 속한 가정에서 가족간의 소통이 잘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소통에서 매우 힘들어할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소통 방식은 나이에 따라 변해가야 하고, 

그것이 그의 행복과도 관련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제의 시간과 오늘의 시간 그리고 내일의 시간이

변하지 않고 동일하게 흐르는데

우리의 생각과 습관만 갑자기 변하도록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바쁘고 지친 일상이라도

조금이라도 생각하면서

정신적인 여유를 가지도록 노력하면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서

살려고 하는 삶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2018/01/29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1

2018/01/30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2

2018/01/31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3

2018/02/04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4

2018/02/05 - [달봉이방] -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5



인공 지능이 나타나기 전에도, 일, 돈, 권력, 사랑 그리고 인간과 , 인생, 삶의 관계가 정확히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우리의 인생이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일, 돈 그리고 권력과 사랑에 몰두하면서 살아왔다. 그것들이 가치있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본능"이라고 믿었었다. 권력욕, 일하고자 하는 욕망, 사랑에 대한 바램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지금까지는 이런 가치들에 대한 당위성을 이론 차원에서 추상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본능"이라고 말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에는 힘들어져 버렸다. 이런것들이 왜 가치있는지에 대한 기존의 설명과 대답은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논리적이지 못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그것은 이론으로 끝나도 괜찮은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이론이나 가정 차원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인간의 생존과 실존과 관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답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인공 지능"이라는 다른 종에 의해서 인간이 대체 가능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 같고, 실제로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공 지능이 나온 후에도 계속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인류가 발견한 가치 중에서 "사랑"만큼 유용한 가치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가치들을 평가하는 일을 이제는 미룰 수 없을 것이다. 

일, 돈, 권력을 대체할 것이 무엇일까? 

현재의 이런 가치들을 대체하고도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떤 새로운 가치가 등장해야 인간의 삶이 가치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될까? 

이런 가치들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고도 인간은 계속 생존해 나갈 수 있을까?


이런 가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런 가치들을 찾는 "인간 자체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실존적인 답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또 "인생의 가치"를 물어야 할 수 있다. 이런 가치들과 행복 그리고 인간의 본능과 인간의 가치, 인생의 문제는 이제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과 관련된 질문이다. 


인류의 성현들은 인간과 인생의 생존과 그 가치에 대해서 철학해 왔다. 그들의 노력의 결과로 우리는 추구할 수 있는 가치를 구했고 그 가치를 믿으면서 행복하다고 믿고 살아왔다. 이제는 새로운 생존 철학 세계가 구축되어야 하는 때이다. 


영상에서 말하고 있듯이, 지금 당장은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라는 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과도기이다. 새로운 요구사항에 따라서 어디에선가 산책길을 거닐면서 치열하게 사색하고 있는 선각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사회와 정치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항상 주시할 수 밖에 없다. 인류의 생존과 그리고 각자의 의미와 행복을 위해서 철학과 정치 참여 등에 대한 관심은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나 때"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픈 이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아픈 마음도 내가 가고 나면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그냥 모른 체 하고 있어야 하나? 


인간이 있든 없든 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을 수 있을까? 신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인간이 아니어도 사고할 수 있는 다른 종()이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까? 


신은 그 자체만으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하자. 그러나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산출물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 종교는 인간이 존재해야 의미 있을 것이다. 인간이 다른 종()으로 대체되어도 상관없는가? 완전히 인간을 닮은 존재를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가? 사랑을 할 수 있는 감정을 갖는 존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만 계속 우기고 있을 것인가? 그 "개인의 생" 동안에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다. 인간에게 호기심과 궁금함이 있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본능이 있는 한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다. 


종교적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만 "안 된다"고 막고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교리와 윤리 도덕으로 막는다고 해서 일어날 일이 안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가치 관점에서 봤을때 이제 인간이 무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종의 출현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 


굳이 머피의 법칙이라는 이론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종교도 알고 있고 우리 개인들도 알고 있다.  그것이 인간과 세상사라는 것은 경험으로도 알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는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 교리와 윤리, 도덕에만 의존한 채 "안 된다"고만 고집하는 것은, "말은 해 보겠으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내 책임은 아니다"라는 태도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아니면 "내 생 동안에만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를까? 


새로운 종 또는 인간의 변형이 우리의 사회 구석 구석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왔을때도 계속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만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것인가? 실제로 그때가 되면 인간과 세상을 포기하고 종교로서의 역할을 그만 둘 것인가? 어떤 식의 선택을 하든 간에 인간의 가치와 인생의 가치에 대한 질문에 답을 준비해야 한다. 이제는 윤리와 도덕의 관점이 아닌 실존과 생존의 관점에서 종교도 함께 철학하고 고민해 줬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아이의 교육과 관련해서는, 

공부보다는 아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빨리 스스로의 길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학원도 아이가 원하는 곳만 보냈다.

다만 영어 회화 하나만 제외하고는. 

영어 회화는 아이가 커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한 도구라는 논리로 설득을 강요(!)한 면이 있다. 

이런 생각은 다행히 집사람도 긍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도 이런 식의 교육 방식을 계속 유지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우리 부부 모두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결정을 계속 미뤄오고 있었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 학교는 '혁신 학교'라고 해서

지금까지는 정식 시험, 즉 중간고사, 기말고사 같은 시험이 없었다. 

일단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뭔가 다르겠지' 하고, 학교만 믿고 지내왔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가 6학년이 되면서 부터 
전체 학부모회의 결정으로 아이 학교에서도 중간,기말고사 시험을 도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봐 왔던 아이의 생활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허락된 시간안에서 게임하는 것
만화책으로 나머지 시간을 보내는 것. 

'시험을 본다는 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아이의 생활 스타일에 불만이 생기면서, 
아이도 아빠의 불만을 눈치챘는지 사이가 불편해진다.

'뭔가 문제가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와 아이의 생활은 그대로인데, 
부모인 내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미뤄왔던 아이 교육에 대한 전략을 결정하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결국, 지금까지 미뤄왔던 아이 교육에 대한 큰 그림의 초안을 작성하게 된다.

단순히 기술적으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고 
나름 나의 인생 경험과 믿음과 가치를 기반으로 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앞으로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기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물론 세세한 부분의 수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고민도 계속 될 것이다. 

가족 캠핑에서 큰 그림과 전략을 공유하고 서로의 생각을 알아봐야겠다.
발표할 자료를 준비한다.  


※ 참조

행복의 기본 정석 서울대 최인철 교수

열렬(10:10) 교육” - 인제대 김창룡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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